한때 일본 젊은 세대에게 철저히 외면받던 갈색 액체가 있었다.
지금의 인기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지가 바닥이었다.
가게에서 그 병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이 꼰대냄새 뭐야?”라며 피하던 술, 바로 산토리 ‘가쿠빈’ 위스키다.

‘꼰대 술’에서 인기 폭발 하이볼의 탄생까지
과거 일본의 위스키 시장은 거의 무법지대였다.
위스키라고 팔던 것들은 대부분 '주정 + 향료 + 색소' 수준의 조악한 제품이었다.
감기약처럼 달짝지근한 위스키가 대중에게 익숙하던 시절이었다.
산토리 창업자 토리 신지로는 이 상황이 너무나 불만이었다.
“이게 무슨 진짜 위스키냐” 하며 스코틀랜드 방식 그대로 만든 정통 위스키를 선보였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달달한 짝퉁 위스키에 길들여진 입맛에서 피트 향, 스모키 향은 그저 병원 소독약 냄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리 신지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방식 그대로 따라 한다고 일본에서 통할 리 없다.”
그는 일본 음식에 어울리도록 위스키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강한 스모키 향을 제거하고 와인 오크통 숙성을 통해 과일향과 은은한 단맛을 부여했다.
생선회, 간장조림 등 일본 밥상에 맞게 ‘튀지 않는’ 부드러운 향을 조정해서 탄생한 위스키가 바로 각(角) 모양 병의 ‘가쿠빈’이다.
스트레이트로는 심심하지만 하이볼로는 완전체
가쿠빈 자체는 향이 강하지 않다. 그러나 탄산수와 만나면 성능이 완전히 열린다.
튀김이나 가라아게처럼 기름진 음식을 한 입 베어 물고 살얼음 잔에 담긴 가쿠 하이볼을 털어 넣으면 차갑고 강한 탄산이 입안의 기름기를 싹 씻어내고 말린 나무향 같은 고소하고 깔끔한 풍미가 딱 남는다.
단맛의 질척함 없이 절제된 끝맛, 가쿠빈 특유의 ‘깔끔함’이 하이볼이라는 방식에서 폭발한 것이다.

집에서 같은 맛이 안 나는 이유
산토리는 하이볼 제조에 거의 강박 수준의 가이드라인을 정했다.
탄산 보존을 위해 잔은 무조건 냉동실에서 성에 낄 때까지 얼려야 한다
미지근한 잔은 탄산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비율은 1 : 4 (가쿠빈 1, 탄산수 4)
절대 저으면 안 된다.
탄산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얼음 하나를 ‘꾹’ 눌렀다 빼는 정도면 충분히 섞인다.
이는 일관된 맛을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방식이다.

‘하이볼 타워’ 등장, 그리고 기적 같은 부활
문제는 가게마다 맛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산토리는 아예 하이볼 전용 기계(하이볼 타워)를 개발한다.
- 일반 탄산의 3배에 달하는 초고탄산
- 얼기 직전의 온도를 유지해 항상 차갑게
- 레버만 당기면 황금 비율이 그대로 나오는 시스템

덕분에 어느 이자카야든, 시골의 작은 술집이든 항상 같은 맛의 하이볼을 팔 수 있게 되었고 매출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과거 “꼰대 술”이라며 버림받던 가쿠빈은 단순히 마시는 방식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일본에서 가장 세련되고 인기 있는 술로 완전히 부활했다.
광고 전략도 부활에 큰 역할을 한다.
당대 여신급 배우 코유키를 섭외해서 포근한 분위기로 광고를 만든다.
어느 골목에 있을 법한 작은 바의 사장으로 나오는데 화면 전체 톤이 따뜻하고 포근한 노란색 배경에 그윽한 눈매로 손님을 쳐다보면서 얼음을 가득 채운 하이볼 잔을 내민다.
"위스키 좋아하시죠?" 하면서 건넨 하이볼 한잔은 힘든 하루를 보상받는 느낌을 받게 했다.
광고가 나가자마자 일본 열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재들에겐 낭만과 향수에 젖게 했으며, 젊은 층에겐 어른들의 힐링이 저런 것인가 하고 호기심을 자극했다.

위스키의 ‘재해석’이 만든 성공
가쿠빈 하이볼은 단지 한 브랜드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건 ‘문화에 맞게 재해석하면, 낡은 상품도 다시 살아난다’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일본식 일상 식문화와 결합한 것, 그리고 하이볼이라는 음용법을 철저히 연구한 것,
이 모든 게 위스키를 다시 일본 주류 시장의 중심으로 돌려놓았다.
가쿠빈 하이볼은 더 이상 아재들의 서랍에서 잠들던 술이 아니다.
지금도 일본 이자카야의 필수 메뉴로 자리 잡은 ‘클린 & 드라이’한 한 잔의 매력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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